나는 마흔에 출산했다.
출산 전에도 기억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출산 후 더 심해진 것 같다. 아이를 재우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는데 오늘 아이와 뭘 했는지 떠올리면 금세 생각이 안난다. 분명 어제와 다른 하루를 보냈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기도 하고, 깔깔 거리며 웃던 일들도 있었는데. 까마귀 고기를 먹은 여자처럼 까무룩. 당장 오늘 하루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제가 되고 엊그제가 되고 일주일 전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년이 지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는 게 없겠다는 생각에, 뭐라도 기록으로 남겨야겠단 간절함이 찾아왔다. 그래서 만들어놓고 잘 쓰지도 못한 블로그를 찾아 일단 뭐라도 적어보기로 했다.
어제와 오늘, 아이는 처음으로 상상 놀이를 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테이블에 빈 접시를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빈 접시에 손을 놓고 집어먹는 시늉을 하며 재밌다는 듯 빙긋 웃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며칠 전에는 할아버지와 모레놀이 도구를 가지고 집에서 놀았는데, 모레를 퍼서 양동이에 붓는 시늉을 했었다. 20개월에 벌써 상상놀이가 가능하다니, 놀랍다. 대학원에서 심리학 전공을 하고, 요즘도 관련 도서를 스터디하며 읽고 있지만, 책으로 읽은 걸 기억하고 있는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허허.
18개월 전후로 재접근기에 들어선 아이는 자기주장, 고집도 세지고, 떼도 늘었다. 아이 키우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정말 많이 느낀다는 이 시기가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대상관계 이론서를 읽다보면 엄마의 책임이 너무 무겁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재접근기의 아이가 부모로부터 안정감있게 수용받고 보듬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성인이 되서도 그로부터 비롯되는 부정적인 영향(감정조절 및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0~3세 육아 중 어쩌면 가장 길고 험난한 이 시기를
아이와 나, 아빠 모두 무사히 잘 지나가길 바란다. 이 시기가 가장 힘든 건 어쩌면 가장 폭발적인 내적인 성장이 이뤄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상상 놀이가 가능할 정도로 성장한 인지, 감정을 인식하고 분출할 수 있는 능력,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물건을 조작하고 작업을 완수하는 능력,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먼저 웃을줄 아는 사회적인 능력 까지. 아이는 그야말로 폭풍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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